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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재 [칼럼] 다완(茶碗)과 임진왜란
작성자 teakorea (ip:112.187.206.43)
  • 작성일 2017-10-17 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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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주)티코리아그룹 대표이사의 칼럼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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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완(茶碗)과 임진왜란

유진규 장로l승인2017.06.14l수정2017.07.18 16:14l3095호 l조회수 : 1004


가루차(말차)를 마실 때는 일명 찻사발 혹은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다완(茶碗)을 사용한다.

일본의 국보 26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간 이도다완 또는 정호다완이라고 불리우는 찻사발 20여 점이다. 그중에 한 점은 현재 교토 다이도쿠샤(大德寺)에 보관된 '기자에몬이도다완'이다. 이 찻사발은 400년전 오사카의 상인인 다가다 기자에몬이란 사람이 입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에게 헌상했고, 그가 죽은 뒤 오리베라는 사람에게 갔다가 다시 도쿠가와 이예야스(1543~1616)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족보가 있는 다완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다완을 좋아하는 일본 차인들은 죽기 전에 이 이도다완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다완을 애호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차(茶)선생인 센노리큐(千利休)를 통해 차를 배웠고, 특별히 이도다완을 애호하여 일본의 다이묘(大名)에게 조선의 찻사발을 하사하는 것을 즐겨했다. 이때부터 모든 다이묘들은 위정자와 친교를 위해 차문화에 몰입하게 됐다. 히데요시 주변의 무사들은 그와의 친교나 동맹을 목적으로 이도다완의 수집에 광적인 집념을 보였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이도다완을 히데요시에게 헌상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특별히 환심을 사기위해 조선의 어딘가에 있는 막사발을 구해 헌사하려 했다. 당시 왜인들은 조선과 무역(1423년부터 시작)을 위해 마련된 삼포왜관(염포, 부산포, 내이포)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조선의 막사발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급기야 1592년엔 임진왜란이, 5년 뒤인 1597년엔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조선을 침략한 사무라이들의 눈에 조선의 도자기는 신천지의 보물이었기에 수많은 왜군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찾는데 혈안이 됐다. 그리고 이들은 도자기뿐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기장(沙器匠)까지 일본으로 끌고 갔는데, 그들은 대부분 조선 전역의 도예명인들이었다.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끌려간 공주의 이삼평(李參平)은 사가현 아리타 지역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고, 남원골의 영수 심수관은 도공 박평의를 비롯해 80여 명의 도공과 함께 정유재란 때 일본 사쓰마(현 가고시마)로 끌려간 후 자신도 도공이 돼 420여 년 동안 15대에 이르기까지 청송 심씨 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심수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들 뿐 아니라 수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치욕스러운 삶을 살면서 오늘날 일본 도자기의 명성을 만들어냈다.

다완은 조선의 다도를 이끌어간 명기이며 민족의 혼이 담긴 찻사발이다. 왜인들이 그토록 소장하고 싶어하는 다완을 어찌 우리 국민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그 가치를 알아보는 것일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가루차를 다완에 우려 본다.


유진규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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